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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당시 상복을 입고 국회 본회의장에 등장했다. 이 의원의 부친 부고와 함께 ‘상중 표결’ 소식이 전해지면서 주변의 위로와 격려도 많이 많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날인 13일, 초선 의원인 그가 생애 첫 대정부질문에 나선 모습을 아버지는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고 한다. 장례를 마치고 20일 국회 의원 서울신용 회관에서 만난 이 의원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분명 표결에 참여한 것을 잘했다고 하셨을 것”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탄핵 표결 앞둔 아침 7시, 걸려온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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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 안에 놓여있는 간이침대. 계엄 이후 이 의원은 이 침대에서 잠을 자며 국회 내에서 비상대기했다. 2차 탄핵 표결이 예정된 14일 아침,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동생의 전화도 이 침대에서 받았다. 김판 기자



생에첫주택이 의원은 여야 의원들과 함께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차원에서 네팔 출장 중 비상계엄 소식을 듣게 됐다. 바로 귀국행 비행기에 탑승했고 지난 5일 잠깐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들르는 길에 병원에 계신 아버지와 10분 남짓 짧은 인사를 나눴다. 이게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몰랐다. 계엄 해제 이후에 국회 비상 대기가 걸렸고, 이 의원은 계엄 관련 정황을 담보대출이자율 연일 폭로하며 의정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렇게 9일째 국회를 지키던 날 아침, 동생으로부터 다급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병원에 계신 아버지가 위독하다고 했다. 이날은 윤 대통령 탄핵 2차 표결이 예정된 날이기도 했다.

바로 차를 타고 병원으로 출발했지만, 아버지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 의원은 빈소를 마련하고 마이너스대출이란 상복을 입은 채 바로 국회로 돌아와 탄핵 표결에 참여했다. 국민의힘의 비협조 속에 한 표가 아쉬우던 상황이었다. 약 30분 정도 걸리는 개표를 지켜볼 여유도 없었다. 이 의원은 표결에 참여한 뒤 곧바로 빈소로 출발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탄핵이 가결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의원은 표결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중에 표결한 것을 사람들이 대단한 것처럼 말하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고민 없이 바로 국회로 왔습니다. 아버지가 위독하셨더라도 정신이 맑으셨다면 분명 표결하러 가라고 말씀하셨을 거예요. 저희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거든요.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굉장히 강한 분이셨어요. 아마 그때도 말씀은 못 하셨지만 분명히 표결에 참여하는 걸 잘했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형, 대정부질문 하는 거 아버지께 다 보여드렸어”






이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3일 국회 본회의 긴급현안질문에서 한덕수 당시 국무총리를 상대로 질의를 하고 있는 모습. 초선 국회의원인 이 의원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날 처음으로 국회 본회의장 연단에 서서 질의를 했다. 국회방송 캡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날인 지난 13일, 초선 국회의원이 된 첫째 아들은 생애 처음으로 본회의장 연단에 올라 국무위원들을 상대로 날카로운 질의를 쏟아냈다. 아버지도 그 모습을 병상에서 지켜봤다. 마지막으로 본 아들의 모습이었다. 이 의원의 동생이 휴대전화로 생중계되고 있는 질의 모습을 아버지한테 보여드렸다고 한다.

이 의원은 윤 대통령 탄핵 표결 하루 앞두고 열린 본회의 긴급현안질문의 마지막 질의자로 본회의장 연단에 섰다. 이 의원은 “국회의원이 되고 첫 질문을 내란 관련 현안질의를 하게 될 줄은 정말로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며 질의를 시작했다.
이 의원은 다음날 표결에서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될 것으로 예상하고, 곧 권한대행을 맡게 될 한덕수 국무총리를 향해 “만약 내일 탄핵이 의결되고 본인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신다면 재의요구권 행사하실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한 총리는 “심도 있게 검토하겠다”는 답변으로 즉답을 피했다. 이 의원은 재차 한 총리를 향해 호소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더라도 경거망동하시면 안 됩니다. 무너진 안보태세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평화를 위협하는 군사적 행동, 국지전의 가능성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너져 가는 민생경제와 경제 상황을 관리하는 일에만 집중하십시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이어 이 의원은 국방부와 경찰 등을 대상으로 계엄의 조직적 정황에 대해서 캐묻고는 다음의 발언으로 질의를 마쳤다.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의 애국심과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다시는 망상에 빠진 괴물 윤석열, 헌정질서를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반드시 여기 계신 국민의힘 의원님들과 손잡고 윤석열을 탄핵하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의원은 자신의 생애 첫 질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때 아버지가 의식이 좀 있으셨대요. 동생이 휴대전화로 제가 질의 하는 걸 아버지께 보여드렸대요. 별 반응은 없으셨다고는 하는데, 그래도 완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는 아니었으니 다 보셨을 거예요. 그나마 아버지께 제가 의정활동 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초선이어서 본회의장 단상에 나간 게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자식 걱정이 결국 아버지의 ‘병’이 됐다






이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부친 이종율씨. 사진은 이 의원이 문재인정부 청와대 근무하던 시절, 청와대 개방 행사에 참여한 부친의 모습. 페이스북 캡처



이 의원의 아버지는 누군가 자식들을 잡아가려고 한다는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오랜 시간 시달렸다고 한다. 이 의원과 동생이 학생 운동을 하느라 평생 자식 걱정을 해 온 영향으로 추측된다. 약 10년 전쯤 갑자기 병이 찾아와 병원에 조기 입원해 한 달 정도 치료를 받고 상태가 많이 호전됐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다시 증상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 의원은 문재인정부 청와대에서 5년 내내 근무한 참모였다. 하지만 정권 교체 후 문재인정부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자식 걱정을 멈출 수 없었다. 노동 운동을 하던 이 의원의 동생도 고초를 겪었다. 아버지의 걱정은 커져만 갔다. 아버지는 자시들을 볼 때마다 “너 괜찮냐” “조사받거나 수사받는 거 없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다 올해 초 갑자기 병세가 악화됐다.
총선을 치르던 지난 4월에는 아버지가 극도의 공포감에 홀로 집을 나선 적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자식들은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셨는데, 폐렴까지 겹치면서 큰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그렇게 투병 생활을 하던 중 지난 3일 밤 불쑥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아들은 계엄 이후 국회를 지키며 윤 대통령 탄핵에 몰입했다. 아버지는 윤 대통령 탄핵이 가결되는 날 세상을 떠났다.
표결을 마치고 돌아온 빈소에는 ‘아드님께서 민주주의를 지킵니다’라고 적힌 조화가 배달돼 있었다. 이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 조화 사진을 올리며 “탄핵 표결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 조화를 발견하고 큰 위로를 받은 듯 울컥하더군요. 많은 분들께 격려와 응원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오늘 아들이 보낸 하루 끝에 수고했다, 기뻐하시며 떠나셨을 거라 생각하며 힘을 내봅니다”라고 적었다.
이 의원은 아버지의 병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본인 일로는 누구 멱살 한번 잡은 적이 없어서 파출소도 가본 적 없는 분인데, 저와 제 동생이 학생운동 하다가 수감돼 아버지께서 옥바라지하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그러다가 윤석열정부 들어 문재인정부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고, 노동 운동하는 동생도 고초를 겪다 보니 아버지한테 다시 충격이 온 것 같아요. 항상 ‘너 괜찮냐’고 걱정을 하셨어요. 결국 그게 병이 된 것 같아요. 그렇게 자식들 걱정 많이 하시면서 힘들게 살다 가셔서 자식 된 입장에서는 원통합니다. 퇴원하시면 반듯하게 차려입고 아버지와 사진을 한 장 찍으려고 했는데, 결국 찍지 못했네요.”



이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판 기자


이 의원이 지난 1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아버지에 대한 글을 동의를 얻어 함께 싣는다.



나의 아버지 이야기 1
이종율, 38년 생이시니 우리 나이로 87세, 지금은 와병 중이셔서 서울 모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누나는 일본 동경에서 본인은 중국 심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린 시절은 본가가 있는 전남 장흥 유치면에서 보냈습니다.

체격이 크고 호방한 기질의 할아버지는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무역업 등으로 한때 상당한 재력을 가지셨다고도 합니다. 태평양전쟁으로 일제의 폭압이 극에 달한 44년 당시 독립운동을 지원하셨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신의주 교도소에 투옥되셨고 출소하자마자 신의주 현장에서 사망하셨습니다.

당시 시신을 수습한 외삼촌의 증언에 따르면 모진 옥고를 견디지 못하자 사망 직전 석방되었고 가족들에게 바로 인계되었다고 합니다. 한 줌의 재가되어 도시락 크기에 작은 목기에 담겨 돌아온 할아버지를 7살이던 아버지는 도시락으로 착각하고 배가 고프니 자신이 먹겠다고 삼촌에게 달라고 했다가 혼이 난 기억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상범의 가족은 연좌제의 고초를 받았던 터라 이를 걱정한 집안 어른들은 선산 가장 위 인적이 드문 곳에 매장하고 사망 사유를 이웃들에게도 일체 함구합니다. 그 덕에 장흥댐으로 수몰되어 선산이 모두 이장되었으나 할아버지의 묘만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옥사를 인식하기에 어렸던 아버지가 그 사실을 확인한 것은 무려 46년이 지난 1990년입니다. 90년 5월 10일 군사정권과 야합한 YS와 JP가 민자당 창당했고 학생들의 반대 시위가 87년 6월 민주화 시위 이후 가장 큰 규모로 정국을 흔들었습니다.

당시 학생회장으로 반대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된 아들의 구명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아버지는 뜻밖에 연로한 외삼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으셨다고 합니다. “너히 집안의 피는 속일 수가 없구나”

아들의 구속으로 충격을 받으신 아버지가 더 놀란 것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의 서사이셨던 듯합니다. 요즘도 약주 한잔하시면 “내가 배가 너무 고파 우리 아버지 뼛가루를 도시락이라고 생각하고 먹겠다고 덤볐어.” 하며 허허롭게 웃으십니다.

할아버지의 죽음과 6.25 분단 전쟁을 겪으면서 가세가 무너져 소년가장으로 형언하기 힘든 가난 속에 성장하셨습니다. 6.25가 한창이던 시절 유치면은 낮과 밤을 바꿔가며 경찰과 빨치산이 주인이었던 혼돈의 공간이었습니다. 쌀 한 줌이 1환이었던 그때 그 돈을 벌기 위해 총알도 없는 자기 키만 한 M1 소총을 들고 경찰지서에서 야간 경계를 섰습니다. 빨치산의 공격을 두려워한 경찰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고 가난한 아이들을 1환의 목숨값으로 관공서를 지키게 한 겁니다. 가족들의 한 끼 식사를 위해 13살 그 어린 나이에 목숨을 걸었던 그때의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나의 아버지 이야기 2
가난한 유년 시절은 청소년기로 이어졌고 어떻게든 가족들을 부양하며 공부를 하고 싶었던 아버지는 10대 중반에 서울로 상경해 벽돌공장 벽돌공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야간고등학교를 다니셨지만 그마저도 졸업은 못 하셨습니다. 서대문에 있는 인창고등학교 야간반을 잠시 다니셨던 것이 마지막 학력이십니다.

성인이 되어 다시 고향에 내려가 어머니를 부양하던 아버지는 1960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던 시기에 모든 살림을 정리하고 강원도 인제로 이전해 작은 중국집을 운영하셨다고 합니다. 61년 치러진 국회의원선거에 목포를 떠나 인제에서 출마한 김대중 후보를 밀어 당선시켰다는 것이 가끔 들려주시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아버지의 첫 기억입니다. 아시다시피 2일의 임기로 끝나버린 김 대통령의 첫 국회의원 당선입니다.

68년 어머니의 고향인 전북 부안으로 다시 이주하셔서 결혼하셨고 첫아이인 제가 태어났습니다. 75년 아이들은 서울에서 교육시켜야 겠다고 생각하신 아버지는 다시 서울 관악구 봉천동 달동네로 아이 셋을 데리고 이주합니다. 그 당시 봉천동 102번지 달동네는 상하수도 시설도 없습니다. 동생을 포대기에 업고 물지게를 지던 어머니의 모습이 선합니다. 그해 서울은 급격한 산업화로 노동자들이 필요했고 농촌 인력이 대거 상경한 해입니다. 75년 한해 서울 인구가 100만 명이 늘었다는 자료를 본 적이 있습니다. 본격적인 산업화와 수도권집중이 시작된 해였습니다.

3남 1녀의 자녀를 키우셨습니다. 본인 일로 파출소 한번 안 가보신 분이지만 자식들의 사고? 로 긴 시간 경찰서, 법원, 교도소를 다니셔야 했습니다. 저도 2년의 수감생활 했지만 둘째도 대학에 진학해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긴 수배 기간과 구속을 겪었습니다. 진보정당 운동을 하는 동생은 지금도 노동조합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체대에 진학한 막내동생은 지금 스노보드 국가대표팀 이상헌 감독입니다. 집안 내력으로 보면 특이한 직업이지만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설상 종목 첫 은메달리스트 이상호 선수를 키운 미담 기사를 많이 내준 아버지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나의 아버지 이야기 3
민주시민 교육
선거가 있던 날 아버지는 새벽에 아이들을 깨워 목욕을 시키셨습니다. 평소에 입지 않는 정장을 입으시고 6시 전에 줄을 서셨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부모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누굴 찍는지 왜 선거에 참여해야 하는지 일체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주권자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참정권의 기본을 가르쳐 주신 듯합니다.

목에 칼
약주를 잘 못 하셨지만, 사업상 술을 드시고 들어온 날은 아이들을 다 불러 앉히고 “남자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한다.” “공부만 잘해준다면 끝까지 지원하겠다.” 취기에 항상 던지셨던 훈계였지만 되짚어보면 유년기부터 시작된 가난 속에 본인이 다하지 못한 번듯하고 당당한 인생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걱정이 진짜 병
항상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아직 큰 병치레는 없었고 본인의 건강 관리에 철저한 분이시지만 항상 자식들 문제로 걱정을 달고 사셨습니다. 그 덕에 뭘 결정할 때 아버지와 상의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동생이 수배 중이던 10여 년 전 긴 시간 잠을 이루지 못하시고 결국 병원에 입원까지 하셔야 했습니다. 윤석열 정부의 등장 이후 노동운동을 하는 둘째와 없어져 버린 민정수석실의 마지막 민정비서관이 된 큰아들의 안위를 걱정하셨습니다. 다시 잠을 못 이루시다 현재 병원에 입원중입니다. 문병도 쉽지 않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을 짧게 서술했지만 참 어려운 삶이 셨습니다. 아버지 없는 유년 시절의 고통과 가난, 욕심만큼 배움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소외, 인생을 다 걸고 자식 넷을 키우셨지만 본인의 뜻대로 안정적인 직업이나 경제적 성취를 이루지 못한 자식들에 대한 아쉬움. 국가의 평화와 국민들이 큰 걱정 없는 사는 세상만들겠다는 자식들의 삶이 아버지를 고통 속에 사시게 한 것 같아 죄스럽습니다. 퇴원하시면 잠도 푹 주무시고 자식 걱정 없이 편안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퇴원하시면 아버지와 사진을 하나 찍어야 겠습니다. 같이 찍은 사진을 찾으니 없네요.



김판 기자 p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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