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미 기자]
경남 고성에서 흡족한 첫날(상족암 군립공원, 병풍바위, 학동마을 담장길)을 보낸 후 둘째 날 방문할 첫 예정지는 '그레이스 정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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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월 방문이라면 소문대로 수국 천국일 텐데 3월이라 이른 개나리만 봐도 족하다고 기대를 낮췄다. 도착해 보니 개나리는커녕 공사 중이었다. 그레이스 정원> 문수암·보현암> 고성 향교 정도 둘러보려 했으나 첫 방문지부터 어긋나 기운이 빠졌다. 그제야 검색하니 4월 2일까지 휴장이란다. 미리 검색만 했어도 헛걸음하지 않았을 텐데.
그레이스 정원을 떠나 문수암·보현암으로 가는 길에 고성향교> 만화방초로 예정지를 변경했다.
예상가격단청 없이도 위엄을 더하는 곳 문수암
'문수암·보현암'은 의상대사가 창건한 신라 고찰이다. 2월에 다녀온 제천 '정방사' 역시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이 사찰들은 화엄사상, 문수신앙 외에도 깊은 산중에 위치한다는 점, 절벽 앞에 법당을 두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의상대사는 수행 중심의 산중 사찰을 선호했던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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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언덕과 계단을 통과해야 절벽 위 문수암에 도착한다. 하지만 문수암이 빤히 보이는 코앞에 주차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오를 만한 곳이다. 천불전을 지나 석불좌상이 있는 전망대를 거쳐 문수전에 이르렀다. 단청이 전혀 없는 문수전은 소박하고 단아했다. 하지만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까지 촘촘 최저 히 들여(다포 양식) 위엄을 더하는 건물이었다.










▲  문수암 문수전

리드코프 수퍼론
ⓒ 고성군청 블로그




뒤편으로 가면 깎아지른 암벽이 문수전을 감싼 채 버티어 섰다. 갈라진 석벽 사이에 자연적인 문수상이 있다고 해 한참을 찾았으나 눈에 띄지 않았다. 불자가 아니어서, 시력이 좋지 않아서 안 보이는 햇살론 승인 거라고 옆에 선 남편 말에 동의하며 물러나왔다.


문수암 전망대에 서니 보현암 금동약사여래불이 멀리서도 시선을 제압한다. 수태산에 우뚝 솟은 모습이 장엄하고 거대하다. 약사불 뒤로는 남해 한려수도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장관이 따로 없다 할 만큼 웅대한 광경이다.










▲  문수암에서 바라본 남해안 및 약사여래불


ⓒ 오순미




문수암에선 어디서든 남해를 조망할 수 있다. 그곳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처럼 크고 작은 섬들이 제자리를 지켰다. 산과 하늘, 바다와 섬이 오류 없이 딱 그만큼의 분량을 감당하는 풍경이어서 견고하고 눈부시다.

어수선한 마음이 차분해지는 곳 보현암
문수암과 보현암은 같은 방문지로 보아도 될 만큼 가깝다. 문수암에서 차로 3~4분 내려온 곳이 보현암 약사전이다. 약단지를 든 '금동약사여래불'은 중생의 질병을 치유하고 재난을 구제하는 부처다. 그렇잖아도 잦은 재난이 일어 이재민이 속출하는데 구제의 손길이 알맞게 닿아 불편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약사불을 바라봤다.
약사전 3층엔 13m 높이의 거대한 약사불과 약사불을 둘러싼 '황금 범종'이 배치되었다. 한국 사찰의 범종은 종각에 매달린 형태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보현암은 범종을 돌리며 기도할 수 있게 설계된 것이 특이점이다.

얼마 전 방송에서 경전이 든 원통을 돌리며 기도하는 티베트 사람들을 본 적 있다. 원통형의 경통을 돌리면 경문이 담긴 두루마리가 회전하며 공덕을 쌓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경전이 새겨진 보현암의 범종도 돌리면서 기도하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  보현암 약사전 회전 범종


ⓒ 오순미




약사전에서 2~3분쯤 차를 타고 가야 보현암 법당이 나온다. 법당 앞은 자연 암벽과 연결되었고 뒤편은 남해 풍경을 안은 곳이 보현암 풍경이다. 불자여도 아니어도 어수선한 마음이 차분해지는 마법의 장소였다. 자연과 어우러진 조용하고 여유로운 사찰이어서 누가 와도 비뚤어진 마음이 진정될 듯했다.

점심 후 '고성 향교'에 잠시 들렀다 '만화방초'로 향했다. 검색으론 분명 영업 중이었는데 대문 앞에 'CLOSE'라 쓰였고 인기척 하나 없이 썰렁했다. 아무래도 고성이 수목원 힐링은 허락하지 않는 듯해 서둘러 떠났다.
수목원 두 곳이 누락되는 바람에 예비 지역이었던 '옥천사'를 새로운 장소로 선택했다. 하루에 사찰만 세 곳을 여행하게 된 셈이다.
널판장문의 멋 '자방루'를 간직한 옥천사
옥천사 역시 의상대사가 창건한 신라 천년고찰이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기거하던 호국사찰이기도 하다. 평일이어서 성보 박물관 앞 주차장이 널널했다. 편하게 주차 후 언덕을 올라 돌담을 지나니 '자방루'가 보인다.
옥천사 입구에 위치한 '자방루'는 누각 형태의 건물이다. 일반 사찰의 누각보다 규모가 크며 사찰을 보호하는 외곽 방어용으로 지은 것이란다. 내부 또한 상당히 넓어 수많은 신도가 설법을 들었던 곳이라 짐작된다.

북쪽면 7칸은 2짝씩의 널판장문을 달아 밖의 경치를 볼 수 있게 지었다. 7칸의 널판장문이 자방루에 멋을 더하는 핵심 같았다. 옥천사의 품위를 높인 자방루는 문화재청이 보물로 지정한 곳이다.










▲  옥천사 자방루. 자방루는 '꽃향기가 멀리 퍼져나가는 누각'이란 의미로 이 누각에서 부처의 가르침이 꽃향기처럼 퍼져 많은 중생을 제도하기 바라는 염원으로 지은 이름이다.


ⓒ 오순미




조사전(불교 종파를 창시한 조사나 해당 사찰에 기여한 스님을 모시는 전각)에는 여러 스님의 진영이 전시되었다. 품위를 갖춘 스님들과 다른 느낌의 한 분이 눈에 띄었다. 중앙을 차지해 중요 인물인 건 분명했다. 설마 의상대사는 아니겠지 했는데 손전화로 확대해 보니 의상대사가 맞았다. 선묘 낭자가 사랑했을 리 없는 분위기, 위엄이 생략된 듯한 모습이었다. 왜풍도 느껴져 왠지 좀 씁쓸했다.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 것이 여행이다. 예상대로 풀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것, 이상한 것, 기막힌 일들과 조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우천염천> 중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말이다. 예상대로 풀리지 않아 사찰만 세 곳을 방문했으나 한국 사찰에서 보기 드문 '자방루'와 '회전 범종'을 볼 수 있었던 건 덤 치곤 압골미였다. 무엇보다 불교 발전에 공헌한 의상대사 진영과 조우하고 놀란 것이 가장 기막힌 일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 시대 불교 회화 기법은 그것이 최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덧붙이는 글